출처: 이미지투데이(기사와 관련없는 사진,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3·1운동의 배경을 되짚어봤다.)
출처: 이미지투데이(기사와 관련없는 사진,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3·1운동의 배경을 되짚어봤다.)

광복절이 어느새 77주년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리고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의 통치에 대하여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배경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해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을 뿐 아니라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했고,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했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3·1운동의 시작은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강제합병 당한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의 무단 통치에 신음하고 있었다.

일본은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다. 또한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했다.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했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이라는 의의가 있다.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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